January 14, 2011

신사도운동 이 어떻게 교회를 파괴 시키는가?

밑에 글은 김삼 목사님 의 TLT 라는 블로그 에서 보게된 글이다. 톰 스타이프 목사님 이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 책의 서문 으로 쓰신 글이다. 정말 신사도 운동 과 소위 신사도 들이 교회 들을 어떻게 무너 뜨리는지 목사님의 실제 경험을 잘 보여주신다. 너무 잘 설명 되어 있어서 혼자 보기 아까워서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자 이렇게 올린다.

[머리말-추천의 글]

나는 한 번도 영적으로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 어떤 일에 관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사역을 하면서 영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 바로 이런 일이 내게 벌어졌다. 내가 진리에서 그렇게 멀리 벗어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늘 빈야드 교회 연합회(AVC) 지도부에서 일하는 것을 큰 특권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다른 지도자들과 무척 가깝게 교제 했다. 우리는 함께 여러 나라를 여행하기도 하고 교회를 개척하기도 하고 사역에 대한 비전을 나누기도 했다. 우리 모임의 리더는 대단히 존경받던 인물이었으므로, 우리 모임은 곧 새로운 교파로 급성장할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우리는 그 교파의 지도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고 확신했다.

미국 중서부에서 리더 회의가 일주일 동안 열렸는데, 몇 사람이 사적인 모임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 모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예언자들’을 만나는 자리라고 했다. 우리는 이미 교회 안에서 영적 은사를 열심히 사용하고 있던 터라 이 만남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우리는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은 후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보여주실지 기다리고 있었다.

예언자들은 종말의 때에 하나님이 교회에 다섯 가지 사역, 즉 사도, 예언자, 목사, 교사, 복음 전도자의 사역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 중에서 특히 예언자와 사도의 사역이 회복된다는 것에 큰 도전을 받았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는 이미 목사와 교사, 복음 전도자들이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예언자와 사도의 사역만 회복된다면 분명 이 땅 위에 큰 부흥이 일어날 것이었다.

예언자들은 우리가 바로 이 마지막 때의 부흥을 이끌 자들로 선택 받았다고 했다. 또한 이런 마지막 때의 부흥을 이끌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찾아내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 ‘예언자들’에게 자신들과 우리 빈야드 교회 연합이 선택된 자들이라고 말씀 하셨다고 했다.

너무나 솔깃한 말이었다. 매일 매일의 사역을 힘겹게 해 나가며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움도 느끼던 우리들에게 이 말은 정말 듣고 싶던 말이었다. 우리의 애씀과 노력이 하나님의 눈에 특별하게 보였다는 말은 위로 그 자체였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실 때 놀랍고 기이한 일들이 나타나리라는 약속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첨하는 새 친구들의 말을 너무나 열심히 경청했다. 일말의 의구심도 의식 저 밖으로 밀어내 버렸다. 또 나중에 예언자들을 다시 만났을 때, 이들이 우리를 한 사람씩 데리고 나가 우리의 비밀을 상세히 드러냈을 때 의구심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예언자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온 자들이 아닐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확하게 예언하는 모습을 보며 더욱 예언자들을 신뢰하게 되었다. 우리는 예언자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분명하게 확신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며 개인적인 일들을 ‘들여다 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사역이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각자의 교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후 몇 달 동안 우리 중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에서 자신이 하게 될 역할과 위치와 성공 여부에 대해 ‘개인적인 예언’을 받았다. 또한 앞으로 다가올 위대한 ‘회복’과 우리가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리라는 예언을 받았다.
‘예언자들’은 사람들을 정기적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땅’으로 오게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즉시 짐을 꾸려 달려가 확신 가운데 예언을 받았고, 성공적으로 사역하게 되리라는 예언이 현실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다. 심지어 예언자들은 목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며 교회 직원을 교체하기도 하고, 교회의 정책과 관행을 바꿔 버리기도 했다. 예언자들은 목사들 개개인에게 기름부음을 행하고 그들에게 치유와 사도적 약속을 주었다. 그러자 점점 목사들은 예언자들이 전화를 걸기도 전에 자기들이 먼저 예언자에게 전화를 걸어 가르침과 조언을 받고자 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불편해하며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기름부음을 받는 땅’으로 달려갔다가 뭔가 일이 실패하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어떤 목사들은 자신들이 영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예언자들의 꿈과 예언 때문에 잘못 비난받기도 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하기보다는 ‘점괘가 든 과자’를 믿으려는 신앙이 더 활개를 치게 되었다.

몇몇 목회자들은 이런 모임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조금 마음이 꺼려지긴 했지만, ?래도 영적인 은사가 늘 완벽한 방법으로 역사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계속 밀어붙였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풀이 다 자랄 때까지는 베지 마라”는 철학을 들이대며 계속 밀어붙였다. 즉“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다려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당분간 손을 놓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자 예언자들은 계속해서 승승장구하며 교회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약 2년이 지나자 모두가 예언자가 돼 버린 것 같았다. 수백 명의 빈야드 교회 성도들이‘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지도자며 성도며 할 것 없이 부지런히 예언을 하며 다녔다. 사람들은 예언자들이 해 준 예언을 작은 노트에 적어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또 여기저기서 우후죽순 격으로 열리는 예언 집회에 떼로 몰려다녔다. 노트를 들고 몰려다니는 군중은 더 많은 예언을 들으려는 희망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

치유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세미나를 열어서 치유 기도의 공식과 방법을 가르쳤고, 몸에서 ‘열점: 연약한 부분’을 찾아내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기도받는 사람의 몸에 육체적인 ‘떨림’이 일어날 때 그 의미를 해석하는 방법도 가르쳤다.
예언 집회에서 꿈과 꿈 해석이 중앙 무대를 차지하면서 사람들은 꿈을 그대로 노트에 일일이 적어서 가지고 오곤 했다. 그러면 이 꿈을 나중에 하나님의 메시지로 해석했다. 사람들은 예언의 약속들이 현실로 이루어지길 기다리며 조바심내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다림은 수포로 돌아갔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예언 행렬’이 유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많은 사람이 절박한 심정으로 목회자에게 상담을 받고자 줄을 서기 시작했다. 십 대들은 십 대에 성공하여 스타가 되리라는 예언을 받았지만 그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십 대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이 위대한 사역을 하게 되리라는 예언을 받았지만, 자신이 다니는 교회 목사가 그런 자신의 ‘기름부음’을 깨닫지 못하고 그 은사를‘발전시켜’주지 못하는 것에 분노하여 지도자들에게로 몰려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예언에만 치중한 나머지 점점 성경에는 무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보다는 그저 ‘직통 계시’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자신들이 받은 예언이 성취될 수 없을까 두려워하며 이 예언자에서 저 예언자로 옮겨 다녔다. 예언자의 전화번호를 하나라도 더 알고 있는 것은 마치 보물지도를 얻는 것과 같았다. 이제는 예배 시간에도 성경보다는 작은 노트를 더 소중히 여기며 붙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몸을 떨고 눈을 깜빡이는 것이 성령이 임한 증거라는 말을 듣고 그것을 흉내 내기도 했다. 그리고 사역팀이 그것이 하나님의 사인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자신에게 달려와 손을 높이 들고 “주님, 더 임하소서!”라고 기도해 주기를 원했다. 몸을 떨고, 웃고, 울고, 눈을 씰룩거리는 것은 성도들이 지도자들과 동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한 집회에서 8천 명을 대상으로 설교하던 설교가는 목사들이 설교를 준비할 때 주석서를 보거나 원어 사전을 들척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대신 목사들은 예언을 통해 주일날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할지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

우리 교회의 한 성도는 뭔가를 결정할 때 자신의 손이 ‘뜨거워’지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이런 이상한 징조를 추구하는 현상은 바로 우리 교회에서부터 시작했다.

내가 속한 노회의 교회들은 점점 침체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복음주의가 신비주의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교회 출석률이 뚝 떨어졌다. 이유인즉, 사람들이 다른 동네에 사는 자신의 친척들을 교회에 초대하기 꺼려해서였다. 사람들은 너무나 이상한 모습으로 진행되는 예배에 사람들을 초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5년 된 우리 교회에도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이 내 잘못임을 깨달았다. ‘풀’이 이제는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 자라버렸다. 사역은 밑바닥을 치고, 실패가 눈앞에 있었다.

목회 초기에 나의 멘토가 되어주셨던 분이 이런 가르침을 주신 적이 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확신이 서지 않거든 하나님이 이미 하신 말씀으로 돌아가라.” 바로 성경이다! 얼마나 정확한 지적인가! 나는 그동안 우리 교회에 일어나는 일들을 정당화하려고 과거의 부흥 운동과 교회 역사들을 살펴보는 데 완전히 지쳐 있었다. 목사로서 나는 내가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을 얻고자 분명히 알았던 것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다시 말씀을 붙들고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수년간 목회자로 훈련받고 가르치고 설교하면서 알게 된 것은, 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신앙을 바로잡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목자로 부름 받았으면서도 마치 끌려가는 자처럼 행동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목회는 푸른 초장은커녕 삭막한 사막 한 가운데 있었다.

많은 목회자가 자신이 목회자로서 바른 판단을 내렸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 한 차례 큰 홍역을 치르는 것을 보았다. 이런 감정적인 홍역은 가끔 일어나는 일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매년 매주 주일마다 일어난다. 목회자로서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일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의 양 떼를 늑대한테서 지켜내려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새로운’ 가르침이든 교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목회자를 통해야 한다.

나는 내가 처음 곁길로 벗어나 우리 교회에 잘못된 가르침을 허용 했던 때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나는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성령의 불을 꺼 버렸으며” “지금이 바로 성령님을 교회로 되돌아올 수 있게 할 절호의 기회”라는 말을 들었다. 또한 “성령의 불을 끈” 교회의 중죄를 참회하기 위해서는 예배 때마다 “무슨 일이든 허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질서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오소서, 성령이여!”와 같은 외침이 울려 퍼지는 혼돈이 도래했다.
이런 외침은 성령이 무슨 일을 행하실까 기다리는 가운데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어떤 ‘현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기대감이 점점 고조되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 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라는 말씀을 임의로 적용하며 어떤 불안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때는 모든 것이 위로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늘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 마법의 ‘사탄 방패’가 어디까지 막아 줄까? 약 100미터? 아니면 한 60센티미터? 사탄의 앞잡이들이 다시 공격을 시작하는 데 시간제한이 있을까?
우리 중 몇몇은 이런 속임수에 푹 빠져 있었다. 나는 죄의식을 감추려고 내가 그동안 너무 인간적인 리더십에 의존했고, 교회를 너무 통제하려 했다는 식으로 변명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죄를 고백하며 몰려가자 나도 그들에게 슬쩍 동조했다.

성경 어디에도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을 이렇게 잘못 해석하는 것을 옹호하는 구절이 없다. 오히려 성경은(고전 14:17~19) 질서를 명한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혼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것은 나 스스로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나의 의무를 포기하는 것이 옳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고 대신 주관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는 회개해야 했고, 다시 참 목자로 서야 했다.

아내와 나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빈야드 교회 연합 지도자 모임에 참석하려고 준비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을 연습해 보았다. 즉, 우리 교회에 파고든 주관주의를 제거하는 것과 복음주의와 제자도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성도들의 매일의 삶에 성경 공부를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 등이었다.

우리는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빈야드 교회 연합 지도자들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었고, 그들을 사랑했으며, 그들을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진리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모임이 계속되면서 많은 지도자가 이런 ‘예언’을 추구하는 경향이 미치는 결과가 심각하다는 데 관심을 모았다. 몇몇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실수를 고백했다. 그러자 즉각 경고가 들어왔다. ‘예언자’ 즉, ‘그들의 말이 한 번도 땅에 떨어진 적이 없는 자들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지금 우리가 하는 대화를 들을 것이고 그러면 분명 제재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큰형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것도 금기시되었다.

어떤 지도자는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사역의 방향을 알려 주셨다고 말하며, 말씀을 함께 나누었다. 또 어떤 지도자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진정한 교회는 셀 교회고 따라서 모든 공적인 성경적 가르침과 복음 전도를 그만두고 소그룹 모임만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주장했다. 또 어떤 이는 ‘기사와 이적’을 통해 진정한 복음 전도가 일어나고 있으며, 사람들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로 몰려들고 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복음 전도자들을 비웃으며 예언자들의 사역을 지지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들이 집회 때 자주 사용하는 속임수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결국 일주일 동안의 열띤 토론과 기도와 모임 가운데 한 사람이 전 날 밤 꾼 꿈으로 결론이 나고 있었다. 그 꿈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어떤 것도 결정하지 말고 그저 “기다려 보라”고 말씀하셨다? 했다.

실망한 나는 덴버에 있는 교회로 돌아왔다. 나는 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절친한 친구들, 신실한 기독교인들을 향해 “교리로 말미암아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제 우리의 사역은 실패한 실험실 같아 보였다. 모든 것을 주관성에 의존한 것은 목회자로서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왜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모순되는 메시지를 ‘듣는’ 것일까?

나는 이제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나에게 돌보라고 주신 교회를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게 해야 할 때임을 말이다. 그러자 진리가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내와 나는 남아 있는 성도들에게 선포했다. 우리가 만일 다시 기독교의 기본으로 돌아가, 기본을 잘 행한다면 하나님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성도들도 동의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 성경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한 것이 요한복음이었는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응했다. “왜 요한복음이죠? 이건 초신자였을 때 이미 읽었는데요.”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성령 안에서’ 떨고 비트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불평했다. 4,400명이었던 교회가 사람들 이 ‘거룩한 웃음’ 집회에 참여하려고 떠나 버리면서 감소하기 시작했다. 나를 증오하는 메일이 쏟아져 들어왔다. 심지어 그 운동의 지도자는 공적으로 나를 비난하면서 하나님이 내 ‘죄’ 때문에 나를 죽이실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후에 우리가 ‘모략을 받은 해’라고 부른 그 시간들을 참고 견디자 하나님이 말씀에 신실하게 응답하시기 시작했다. 불과 몇 달 안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지식을 알고자 찾아왔다. 세례 받는 자의 숫자도 늘어났다. 사람들의 삶이 급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교회가 다시 건강해지기 시작했다. 하룻밤 사이에 사람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1년도 채 안 되어 우리는 주일 예배를 세 번이나 더 드려야 했다. 현재 우리 교회는 6천 명가량 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 가고자 애쓰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기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매우 간단하다(히 4:12~13; 왕하 22:8~13; 렘 15:16).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과 같은 책은 반드시 출판되어야 하고 독자들은 읽어야 한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 시대에도 바울의 사역을 막으려는 거짓 예언자들과 이교도들과 율법주의자들은 교회 안에 잘못된 교리를 심어 놓으려 애썼다. 몇 달씩 집을 떠나, 열기와 먼지 속에서 말을 타고 혹은 걸어서 먼 거리를 여행하고, 또 힘들여 성경을 하나하나 베껴 쓰는 일을 한 것은 바로 거짓 교리가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은 이상하게도 거짓 교리가 너무나 철저하고 신속하게 파고든다. 성경적으로 바로잡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급박한 때다. 15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교회는 요한 테첼이라는 세속적인 사제의 계책에 말려들어 오염되어 있었다. 테첼은 사람들을 속여 형벌을 면하려면 면죄부를 사야 한다고 현혹했다. 분노한 마르틴 루터는 테첼이 사람들의 영적 불안감과 무지를 이용해 구원의 중재자로 자처하는 것을 반박하며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항목의 반박문을 붙였다. 아마도 우리는 지금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가짜 부흥 운동이 출몰하는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이 그런 시대라면『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 이 책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이 책이 진정한 영적 은사를 사모하고,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에 현혹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자들의 손에 들려진다면 좋은 도구가 될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가짜 부흥 운동에 현혹되었던 사람들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되돌아오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교회는 진정한 개혁을 경험할 때, 비로소 진정한 부흥을 맛볼 것이다.


톰 스타이프
덴버 십자로 교회 목사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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